이와미긴잔 유적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1) 세계적으로 중요한 경제 및 문화 교류를 이끌었다
이와미긴잔 은광은 16세기 동아시아의 전통적 정련 기술인 *회취법을 받아들이면서 은의 현지 생산지로서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양질의 은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미긴잔 은광에서 이용된 기술과 생산 방식은 이후 일본 국내의 많은 광산에도 전해졌으며, 일본 역사상 전례가 드문 은 생산의 융성기를 맞이하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생산된 대량의 은은 무역을 통하여 16~17세기의 동아시아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 금은과 향신료를 구하러 자신들의 문명권을 벗어나 활동 범위를 세계로 넓히던 유럽인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참여하면서 동서양의 서로 다른 경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조긴 3점(왼쪽부터 분로쿠 세키슈조긴, 오토리오사메 조긴, 고쿠요 조긴
*조긴(丁銀): 16~7세기에 제작된 화폐

테이세라/일본도(1595년)
" Hivami " (이와미)부근에 " Argenti fodinæ " (은 광산) 라고 기재하고 있다.

오르테리우스/타르타리아(달단) 지도(1570년)
일본에 [minas de plata](은광산)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2) 전통적 기술에 의한 은생산 흔적이 풍부하게 잘 보존되어있음
이와미긴잔 은광에서는 채굴에서 정련까지의 작업이 모두 사람의 힘,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정련 공방이 은광 현지에 다수 모여있음으로 인해 고품질의 은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600개소 이상의 노두(露頭)채굴 터와 갱도 터가 지금까지도 은광이 있던 산속에 남아있으며, 또한 이 곳 옆에는 예전에 제련 공방과 생활 터전이었던 평탄지가 약 1,000여곳 이상 남아있습니다.
에도시대의 이와미긴잔 은광은 종래의 전통적인 기술을 통한 은 생산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을 맞이한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럽으로부터 산업 혁명을 통해 보다 발전된 신기술이 도입되었지만, 은광석이 고갈되어 광산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이와미긴잔 유적에는 광산 개발의 전통적 기술의 흔적이 잘 보전되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노두(露頭)채굴 터

계단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평지
(3) 은 생산에서 반출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상을 명확하게 나타냄
이와미긴잔 유적에는 채굴에서 정련까지 이루어졌던 광산 터를 중심으로 이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성터가 주위 산들에 있으며, 은광석과 은, 은광에서 필요했던 물자를 수송한 2개의 가도가 은광에서 항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은광으로 인해 번성했던 광산거리와 항구거리는 오늘날에도 지역 주민의 생활터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와미긴잔 유적은 은의 생산에서 반출에 이르는 광산 운영의 전체상을 부족함없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전에 정련에 필요했던 방대한 목재 연료 공급이 삼림 자원의 적절한 관리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이와미긴잔 유적과 그 주변에는 울창한 삼림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광산 관련 유적과 풍요로운 자연 환경이 하나가 되어 *문화적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적 경관…인간이 자연과 공생하는 속에서 육성된 경관
*마부(間歩): 갱도

오쿠보*마부 내부

이와미긴잔 가도 도모가우라도
도모가우라 취락지와 항구

오모리마치 거리
